
동굴 속으로
바다 위는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이었다. 다이빙 보트 위에서 바라본 세부 앞바다는 잔잔하면서도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마리곤돈 케이브는 세부 막탄 섬 인근에 위치한 수중 동굴 포인트로, 일반 오픈워터 다이빙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다. 입수하자마자 느낀 건 수온도, 조류도 아닌 어둠이었다.
동굴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주변 빛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헤드램프에 불을 켜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헤드램프 불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동굴 벽면을 비추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생물들과 산호들이 빛 속에서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안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빛줄기가 수면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이는데, 그 장면이 마치 수중 극장의 조명처럼 아름다웠다. 사진으로 담은 순간들, 헤드램프 불빛 속에 떠 있는 다이버의 실루엣과 사방에서 반짝이는 미세 입자들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이 왜 세부에서 손꼽히는 특별한 다이빙 포인트로 알려져 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일반 다이빙과는 완전히 다른 긴장감, 그리고 그 긴장감을 넘어설 때 찾아오는 경이로움. 마리곤돈 케이브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선물해주는 장소였다.
바닷속 성소
동굴을 벗어나 외벽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마리곤돈 케이브만의 또 하나의 명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산호초 위에 자리 잡은 수중 성모상이다. 처음 그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감정은 놀라움에 가까웠다. 파란 바닷속, 산호와 암반 위에 우뚝 서 있는 성모상은 세월의 흔적으로 표면이 군데군데 자연스럽게 이끼와 해조류로 뒤덮여 있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이 장소에 더 깊이 녹아든 느낌이어서, 인공물임에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직접 성모상 옆에 다가가 떠 있는 순간,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바다 속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 그 앞에 내가 다이버로서 서 있다는 것. 가까이서 보니 받침대에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 성모상이 의미 있는 목적으로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성모상 전체와 주변 산호초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맑고 투명한 파란 물속에 잠긴 모습이 마치 성화(聖畵)처럼 보였다. 필리핀은 가톨릭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나라인만큼, 바다 속에서도 그 신앙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다이빙 포인트로서의 마리곤돈이 아닌, 하나의 수중 성지로서의 마리곤돈. 이 사진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케이브 외벽의 생명들
동굴 안팎을 탐험하는 것 외에도, 마리곤돈 케이브 주변의 산호초 지대는 그 자체로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동굴 외벽을 따라 이어지는 암반과 산호초 지대는 수심에 따라 각기 다른 해양 생물들의 서식지가 되어 있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볼거리가 넘쳤다.
이날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단연 누디브랜치(갯민숭달팽이)였다.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작은 크기에, 짙은 남색과 검은 바탕에 빨간 점들이 박힌 화려한 패턴이 마치 살아있는 보석 같았다. 산호 틈새에 숨어 있어 지나치기 쉬웠지만, 일단 발견하고 나면 그 자리에 멈춰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수중에서 이토록 작은 생물이 이토록 강렬한 색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 매번 놀랍다. 또한 절벽 벽면을 배경으로 파란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다이버의 모습, 광활한 산호 지대를 가로질러 헤엄치는 물고기 떼의 실루엣도 이날 남긴 소중한 장면들이다. 마리곤돈 케이브는 동굴이라는 특별한 공간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그 주변을 둘러싼 생태계까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의 다이빙으로 정말 다양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포인트였다.